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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희의 디사이퍼] 가이드라인 공화국을 위한 가이드라인

Enkkidu 2023. 1. 14. 0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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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사이퍼(Decipher): 난해한 문장의 뜻을 판독하다. 암호를 해독하다.

우리나라에서 가상자산이 사람들의 화제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 2017년쯤이다. 그 해 불기 시작한 가상자산 투자열풍은 투기에 가까운 광풍으로 사회를 휩쓸기 시작했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2017년 9월 가상통화 합동 태스크포스를 구성했고, 가상자산의 ICO(가상화폐공개)를 금지한다고 천명했다.

이에 한 소프트웨어 회사가 헌법소원을 제기했는데, 최근인 2022년 10월 초 그 결정이 나왔다. 결론은 각하. 헌법소원의 대상 자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공권력의 행사’가 있어야 하는데, 정부의 이 ICO 금지방침은 "행정상의 안내·권고·정보제공행위"에 불과하여 공권력의 행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결정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법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다시피,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려면 법률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 헌법상 법치주의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ICO 금지방침으로 사업 목적에 가상자산이나 블록체인이 들어가 있으면 법인등기가 거부되고, 사업자등록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경험을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이것이 단지 ‘행정상의 안내·권고·정보제공행위’에 불과했다니, 사람들이 무언가 단단하게 오해를 했나 보다. 정부가 어떤 행위를 금지한다고 서슬 퍼렇게 천명하는 행위가 사실은 행정상의 안내나 권고에 불과한데도, 순진한 국민들은 이를 정말 금지하는 줄 알았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1년 전에도 있었다. 정부가 2017년 12월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은행들이 가상자산 거래를 위해 계좌를 신규 제공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에 대한 헌법소원 역시 2021년 11월 각하됐다. 이유는 최근 결정과 비슷하다. 위 조치 역시 "금융기관에 방향을 제시하고 자발적 호응을 유도하려는 일종의 단계적 가이드라인"이어서 공권력의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1년 전 결정에는, 올해 결정과 달리 재판관 4인의 반대가 있었다. 반대의견을 낸 이 네 명의 재판관들은 "이 사건 중단 조치 및 실명제 조치는 단순한 행정지도로서의 한계를 넘어 규제적·구속적 성격을 상당히 강하게 갖는 것으로, 헌법소원의 대상이 되는 공권력의 행사라고 봄이 상당하다"면서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진 이 사건 조치는 법률유보원칙에 위반하여 청구인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고 반대의견을 개진했다.

작년 유사 사례에서 설득력 있는 반대의견이 개진됐지만, 올해 내려진 결정에는 아무런 반대없이 재판관 전원이 각하결정을 내렸다. 남발되는 가이드라인도 문제지만, 아무런 법률적 근거 없이 ‘금지한다’고 선언하는 행위가 법치주의 국가에서 아무 반대의견 없이 실체 판단의 기회조차 박탈된 채 각하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이 사례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에서 성문화된 행정지도에 해당하는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새로운 현상들을 규율하기 위해 수 없이 공표되고 있다.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 조각투자 가이드라인, P2E 게임 가이드라인 등등… 이를 발표하는 기관도 다양할 뿐더러, 그 내용도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가히 가이드라인 공화국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빠르고 이를 규율하는 법률의 제정은 느리기에 그 공백을, 가이드라인을 통해서라도 메워야 하는 정부의 고민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행정수요를 가이드라인으로 해결하려다 보니, 행정지도에 불과한 것이 사실상 법률처럼 작동하는 등, 법치주의 원칙을 뒤흔드는 부작용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필자는 가이드라인을 보다 가이드라인답게 만들기 위해, ‘가이드라인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첫째, 가이드라인에는 국민의 행위를 금지하거나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겨서는 안된다. 새로운 현상에 대해 국민의 행위를 금지하거나 어떠한 형태로든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반영하려면 가이드라인이 아닌, 정상적인 국회의 절차를 거쳐 제정되는 법률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둘째, 기술 발전으로 인한 새로운 현상과 관련하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기 위해서는,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질 수 있을 정도로 사전에 충분한 행정지도 사례들이 축적돼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들의 가이드라인에 대한 예측가능성과 준수가능성이 담보될 수 있다.

셋째, 가이드라인을 준수하지 않은 것에 대해 국민에게 불이익을 가해져서는 안된다. 가이드라인은 어디까지나 행정지도이기 때문에, 행정청이 설정한 방향에 대해 국민의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불준수에 대한 불이익을 가하는 것보다는, 가이드라인을 준수하는 것에 대해 혜택을 부여하는 등으로 국민들의 바람직한 행동을 유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넷째,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후, 행정청은 국민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면서 가이드라인이 올바른 행정지도로 작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나의 가이드라인에 관련 사업이 엮이는 이해관계자는 수도 없이 많고 경우의 수도 다양하다. 행정청이 적극적으로 이해관계자들과 소통하면서 준수 여부에 대해 적극적인 의견을 준다면, 바람직한 행정지도로 기능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법령에 근거하지 않은 가이드라인이 전부 없어져야 한다고 보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면서 그와 관련한 새로운 행정수요에 대해 대응하기 위한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이제 어느 정도 필요악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가이드라인이 법치행정의 원칙에 좀더 부합하면서도 새로운 행정수요에 유연성 있게 대응할 수 있도록, 여러 지혜가 필요한 때다.


조정희 디코드 대표 변호사 jhcho@dcodelaw.com
법무법인 세종 등에서 기업, 부동산 자문과 거래를 18년간 담당했다. 여러 IT기업들과 스타트업을 대리한 경험을 바탕으로 디지털 테크놀러지법 분야를 개척해온 변호사다. 현재 법무법인 디코드(D.CODE)의 대표변호사를 맡고 있다.

 

[원문링크]

https://it.chosun.com/site/data/html_dir/2022/10/24/202210240205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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